지난 2017년 ‘앙리 4세의 눈썹을 가진 고양이’를 출판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선 하래연 작가는 이후 ‘비닐 우산을 일회용 우산이라고 쓰면 슬퍼진다, 2019’, ‘바람구두를 신은 피노키오. 2021’, ‘세상 아름다운 것들은 고양이, 2023’, ‘ChatGPT와 함께한 오늘하루, 2024’, ‘양들의 친목 : 램 카페에선 외롭지 않다, 2025’ 등 6권의 책을 출간했다.
아트그라운드는 하래연 작가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철학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하래연 작가가 친필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
■ 작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9살 때, 시골을 떠나기 직전 학교 운동장을 마지막으로 걸어오며 단짝에게 말했어요. “나는 나중에 시와 동화를 쓸 거야”.
집엔 책이 많았고, 한글을 익힌 이후부터 책에 파묻혀 살다 보니 그런 말을 했나 봐요. 혹은 애초에 제 dna에 저도 모를 ‘글의 꿈’이 새겨져 있던 것일까요?. 하지만 어린 시절의 저는 또래 정서와는 꽤 다른, 지나치게 사변적인 글들을 썼고, 그래서인지 상이나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스스로 소질이 있진 않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글에 대한 열망은 지속됐고,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등 열망에 기폭제가 되었죠. 16살엔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시집을 읽고서, 첫 구절에 눈물이 쏟아졌어요.
‘옛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가슴들이 열리고 온갖 술이 흘러 다니는 하나의 축제였다’라는 부분이었어요. 삶의 원형은 저런 생명력인데, 왜 사람들은 서로 끊어진 채 파편처럼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비극적인 느낌이 와락 들었어요. 그 시가, 제 안에서 무언가를 단숨에 터뜨렸어요.
하지만 저는 심신이 허약했고, 어린 날의 트라우마들도 있어, 학업과 창작을 같이 이어갈 힘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이후 프랑스 언어와 문학을 전공했지만, 글쓰기는 거의 놓다시피 했습니다. 20대 내내 쓴 것이라고는 일기 두어 편이 전부, 30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냥 잔뜩 우수에 잠긴 채로 청춘의 특권인 오류와 혼란을 실컷 누렸죠.
그렇게 흘려보낸 후 어느 날, 불현듯 자각이 왔어요. ‘내가 죽어가고 있구나.’ 앞으로 내게 남은 날들을 헤아려보기 시작하면서, ‘글쓰기의 꿈’을 소환하게 됐어요. 어느 해 생일에는 일기를 쓰다가 문득 누가 불러준 것처럼 ‘피레네’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앞으로 10년 안에 피레네에 가겠다’는 자가 예언을 노트에 적었어요.
그리고 그 말대로, 프랑스 남서부 피레네 지역의 Pau라는 도시에서 3학기를 지냈습니다. 그곳에서의 삶은 제게 처음으로 ‘다른 시간대에서의 나’를 선물해 줬어요. 휴양지처럼 따듯한 기후와 다정한 외국 친구들 속에서 치유와 창조의 동력을 얻었어요.
그곳 학교 선생님과 인터뷰할 때, “10년 뒤 뭘 하고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어요. “나 자신의 책을 쓸 거예요.” 프랑스어로 소설을 쓰는 수업에서 극찬을 받기도 했고, 제가 사용하는 어휘가 다르고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조언을 여러 선생님에게서 들었어요.
그렇게 프랑스라는 환경이 제 문학의 인큐베이터가 됐습니다. 그 도시를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피레네 체류에 대한 감회로 눈물이 흘렀고, 바로 이 순간 노트를 열어, 우선 첫 책의 에필로그를 써 내려갔어요. 귀국하여 완성한 원고를 출판사에 투고했고, 전 직원의 만장일치로 채택되면서, 저의 작가로서의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글이 다시 저를 찾은 건 마흔이 넘어서였어요. 첫 책 ‘앙리 4세의 눈썹을 가진 고양이’를 쓸 때의 저는, 단지 ‘다시 말하고 싶다’는 감정 하나로 출발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선언보다는, ‘내가 나이기 위해’ 쓰기 시작했어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무너졌던 자신과의 연결을 복원하려는 말들이었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쓴 문장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닿으면서, 자연스럽게 작가라는 이름이 따라온 거지요. 처음부터 명함에 쓰기 위한 말이 아니었던 만큼, 지금까지도 저는 글을, ‘작가라는 직업을 갖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언어’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래연 작가 신간/이곳출판사 제공
■ 최근 출간한 신간은 어떤 책인가요?
이번에 출간한 ‘양들의 친목: 램 카페에선 외롭지 않다’는 제가 단골로 다니던 '램Lamb'이라는 실제 카페를 배경으로 쓰인 산문집입니다.
그곳은 말하자면, 저에게는 치유와 창작의 숨결이 이어지는 은밀한 거점 같은 장소였어요. 혼자인 시간을 외롭지 않게 감싸주는 카페라는 장소의 특성과 그 속에서 흐르던 계절의 리듬, 사람들의 온도, 고요한 감정들이 이 책의 바탕이 됐어요.
그동안 제가 쓴 책들이 여행, 인형극, 고양이 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었다면, 이번 책은 그 창문 앞에 조용히 앉아 있는 ‘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딘가로 떠나는 대신,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일에 집중한 책이기도 해요. 램 카페라는 공간에 사계절 머무르며, 그 계절마다 마음속에 피어났던 감정과 사유들을 천천히 받아 적었습니다.
혼자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정한 거리감이 더 소중해졌죠. 이 책은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롭고 싶지는 않은 이들을 위한 산문집입니다. ‘같이 있지만 방해받지 않는’ 거리감, ‘굳이 말은 건네지 않아도 서로의 온도를 느끼는’ 연대감을 글의 결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독자에게는 이 책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에서 잠시 빠져나와 자기 고유의 호흡을 되찾는 쉼표가 되었으면 해요. “양이 풀을 씹듯, 글귀를 천천히 되새기며, 자신에게 돌아오는 책”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책 속엔, 이런 구절이 있어요.
“나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내가 아니면서 동시에 나이기도 한 모든 이들에게, 감당키 힘들 만큼 벅찬 희열을 한 잔씩 따라 보낸다. 어디론가 끝없이 향기를 전송하는 바람처럼, 내 샘에서 길어 끓여낸 찻잔을 모두에게 건넨다.”
■ 문인으로서의 신념과 철학
저의 글쓰기의 기원을 생각해 봅니다. 아기는 태어나면 엄마와 밀착되어 있지만, 점차 심리적으로 독립해 가는 와중에 부드러운 담요나 인형이 엄마의 부재를 대신하는 단계로 들어간다고 하죠. 제가 좋아하는 심리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이런 대체물을 중간 대상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중간 대상과 관계하여 탄생하는, 실재를 대신하는 상상계를 중간 영역이라고 부르죠. 이 개념들은 상징적으로 모든 창조적 행위와 연결된다고 합니다.
이에 비추어, 글쓰기는 저에게 신을 대신하는 중간 영역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외따로이 개체로 존재하는 근원적 고독을 위로받고, 나의 기원 혹은 모태였던 신의 숨결을 매번 소환하고 다시 느끼며, 신이 하는 것 비슷한 창조 행위를 모방함으로써, 저라는 개체의 고유한 개성화를 이루는 것, 그것의 과정이라 여깁니다.
여기 집중하는 것 외에 따로 작가로서의 사회적 사명을 설정하진 않아요. 제가 가변하는 것들에 휩쓸리지 않고 본질적인 탐색을 해가는 만큼, 그 에너지와 그것의 결과물은 세상에 저절로 유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 극진히 본질을 바라보고 지킨다면, 거기에 공명하는 다른 누군가들이 제가 우러르는, 같은 해달별에 감응하겠지요.
다만 현재의 세상은 개체들에 다분히 가혹하고, 그 속에서 개체들은 자기 존재의 의미와 기댈 곳을 찾지 못해 자주 아픕니다. 그래서 저는 존재 본연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고, 삶과 자신이 무의미한 파편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줄 수 있다면 행복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게 있는데요, 지난겨울 계엄 선포 이후 온 국민이 불안을 오래 이어가는 나날들에 저 역시도, 우리 생존과 안위가 어이없는 계기로 위협받고 훼손될 수 있음에 하루하루 잠 못 자며 힘들었어요. 이런 날들에, 어느 날 산책하다 새하얀 돌을 발견했는데, 무슨 위로의 계시처럼 느껴, 이 작은 돌을 주워다 책상 위에 올려두었어요. 그리고 허약해지는 순간마다 이 돌을 손에 쥐곤 했지요. 이 돌이, 다음 그다음 날들을 살게 해주었습니다. 어떤 부적보다 영험했어요.
그리고 저는 제가 아닌 모든 것, 이 세계와 연결되기 위해서 씁니다. 개체를 완성하는 과정은 자기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이라는 수많은 거울과 상호작용하며 얻어가는 전체성과 결합하면서 이루어지니까요. 연결. 우선 나 자신, 그다음 글 자체, 그리고 사물, 사람, 자연, 세계 전체와요.
모든 것은 바뀌고 변하고 사라지고 흩어집니다. 하지만 글이라는 바늘로는 감쪽같이 기워 내어 생명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사라져 보이는 것들에게 불멸의 자리를 부여하고 또 다른 순환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습니다. 신이 선물한 세계 안의 것들은 물리적으로 사멸하거나 잊힐 수 있지만, 우리 연약한 피조물인 인간이 재창조하는 세계는 다시 불멸을 얻고 기억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작가로서 느끼는 르네상스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신이 세상을 만든 사랑 못지않은 또 하나의 사랑입니다. 신이 준 세상을 진실로 완성하는 길입니다. 그것이 생명을 받은 자로서의 응답이고 소명이라 여깁니다.
이렇게 저의 외로움은 구원받은 광물질이 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는 그런 연결이 꼭 시나 산문 등 문학 양식이 아니어도 된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랩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말의 리듬과 운율, 몸의 호흡으로 문장을 체화하는 방식을 실험 중입니다. 저는 랩을 몸으로 기억되는 시라고 느끼고 있어요.
글이 삶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살아있는 언어를 계속 탐색하고 싶습니다.
■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시는 다른 글 분야보다 길이가 짧아 접근 장벽이 가장 낮지만, 작품으로의 진입 장벽은 가장 높은 장르입니다. 논리와 질서를 초월한 경계 없는 초질서의 영역이기에, ‘꿈’의 영역에 가장 가깝습니다. 그 형태로 말하면, 언어의 밀도와 진동을 최대화할 수 있는, 콤팩트한 형태의 압축 주문呪文과도 같지요.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매료되는, 언어가 펼칠 수 있는 몽환의 정수라 여깁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시는 저에게 하나의 장르이기 이전에, 제가 쓰는 모든 말의 밑결을 이루는 바닥 감각입니다. 이 시 쓰기 몰입을 끝없는 훈련으로 삼는 한편, 장르의 경계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글쓰기를 해나가려 합니다. 동화와 인형극 대본도 시도했었고, 노랫말을 써서 뮤지션과 협업도 하고 싶습니다.
글쓰기를 통해서 무얼 이루고 어디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목표가 없습니다. 저에게 글쓰기는 저작이기 이전에 즐거운 놀이입니다. 놀이는 끝없이 만들어지고 하나의 놀이로부터 파생과 변형과 진화가 일어납니다. 그 과정은 미리 정하는 게 아니라 하는 와중에 자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나 자신을 즐겁게 기꺼이 놀이 안으로 던져 놓으면 놀이 자체의 과정이 저를 이끌 것입니다. ‘내맡김으로써 응답받는’ 그러한 즉흥성을 사랑합니다. 제아무리 치밀한들 계획이야 어차피 현실과 만나면 늘 변하게 되어있고, 즉흥적인 것이야말로 시시각각 살아있고, 유동적이며 열려 있는 것이니까요.
예전에 누군가가 저를, 단 세 시간 앞의 일조차 생각지 않고 살아가는, 무위로 사는 사람 같다고 말했는데요, 이 말이야말로 저에 대한 적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제가 저작뿐 아니라 SNS 글쓰기까지를 포함하여 만나게 되는 수많은 인연과 더불어, 의도치 않은 삶의 무늬를 짜나감으로써 예기치 않은 풍요를 이어가고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히 계획한 걸 노력해서 얻는 건 좀, 삶에게 엎드려 절받기 같은 기분이 들고요, 내가 이미 정해놓은 것을 얻는 것도 의미야 있지만, 재미는 덜합니다. 저는 우연처럼 만나는 ‘덤’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삶이 저에게 열어 보이는 미지의 경로들을 탐험하고 싶습니다.
■ 독자들에게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아이를 가져 부모가 되면 이제 좋은 사람이 되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데요, 저도 비슷한 심정입니다. 저의 산물을 세상에 내놓게 되자, 그로 인한 저의 변화가 생기는 것 같아요. 책이란 자식 때문에, 더 진짜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나의 자녀를 잉태하여 내보내려면 태교를 잘해야 하고, 책이 되기 위해선, 그리고 나온 책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내 존재 자체가 그에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죠.
불필요한 감정의 찌꺼기에 휘둘리거나 사로잡힘이,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학습하는 데 필요하기도 하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 늘 휘말려 지낸다면 창조를 위한 순수한 에너지를 생성하기가 어려워지죠. 그래서 창조라는 귀한 순간을 맞고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세상에 순환시키려면, 결과적으로 저 자신 진실해야만 하는 거죠. 작품은 꾸며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독자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세상에 가짜나 속임수, 유혹 가득하여 혼란한 와중에도 등대나 산속 오두막 같은 존재이고 싶어요. 진실한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받고 일상을 살아나갈 사람이 많을 거예요. 물론 세상엔 예술 창작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진실한 분들이 무척 많지만, 저의 자리는 ‘쓰는 사람’이기에, 언어의 힘으로 진실을 전달하는 거죠. 제가 먼저 진실해져야, 진실한 상태에서만 나오는 언어가 흘러나오고, 그게 사람들에게 닿아 기능하게 되겠죠. 글쓰기를 통해 무언가를 의도하기보다, 제가 그 안에서 받는 구원이 자연스레 타자에게 생명력을 갖고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 그게 제가 원하는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독자들이 제 작품에서 위로만을 얻는 데 그치기보다는 기왕이면 자기 안의 갇힌 방을 열어 그 안의 보물을 발견하고, 엄두도 낸 적 없는 숲을 탐험하고 싶어지고, 제가 제 말을 꺼내듯 그분들도 자신의 고유한 말을 꺼내고 싶어지는, 제 글의 생명력이 타인의 자생력을 일깨우는 동력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의 순수한 본연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매일의 목표이자 리추얼입니다. 이런 지고의 기쁨을 두고서 다른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
또, 귀한 발견은 발견자에게도 긍지를 남기는 법입니다. 좋은 작가는 독자들에게, 단지 자기 글에 대한 감탄만을 이끌어 내기보다, 자긍심을 선물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님들이 감탄보다 더 깊은 발견, ‘내가 이런 작가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다니, 내 안에도 이런 귀한 감각이 있었구나, 그럼 나는 진짜구나!’하고 자긍심이 차오르게 되는, 그런 작가였으면 합니다. 독자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작가이고 싶습니다.
홍보를 통해 유통망을 선점하고 베스트 반열에 오른 책들이, 그 시기에 읽고 지나가야 할 책처럼 되어 여러 책스타그램에 등장하는 일이 많아요. 광고에 떠밀려 유행을 따라가는 자본주의식 구매의 대상으로서의 책이 아니라, 오로지 독자의 심미안과 혜안에 포착되어, ‘자기만 알고 싶은 그러나 알리지는 않을 수 없어 근질거리는 어떤 맛집’으로 느껴지면 좋겠어요.
저의 팬분들은 순수하고 예민하고 다정다감하며 상냥하고 시적이며 이지적입니다. 그런 분들과 글의 깊이 속에서 만나는 것이 무척 행복합니다. 제가 제공하는 독서의 공간이, 비밀기지나 요새를 발견한 듯 두근거리며 머물고 싶어지는 그런 것이면 좋겠습니다.
남보다 뛰어나기보다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이 유일무이한, 독보적이어서 대체 불가능한 아우라로 남고 싶습니다.